<사진= 박창희 칼럼니스트>

[LPN로컬파워뉴스] 칼럼니스트, 현실의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길 안내

오늘날의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의 개념은 그것을 信仰신앙하는 者자만이 그 가르침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 대상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홍익인간사상은 무엇을 믿음으로 나에게 그 혜택이 주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행하여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치는 교육이다.

다시 말하면 홍익인간사상은 내가 남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는 정신이 아니고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率先垂範솔선수범과 協협; 어울림으로 相扶相助상부상조의 서로 돕고 사는 것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기독교에서는“더불어 살자.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이런 좋은 말들을 항상 외치고 있는데 그러나 철저하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가르치는 게 바로 기독교이다.

서구의 문명은 이 기독교 정신에 의하여 형성이 된 것이므로 철저하게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8,15해방 이후로 新신 교육을 실시하면서 서구식 교육을 아무런 여과 없이 통째로 받아드려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질서는 무너지고 혼돈의 사회가 되었는데 이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가?

자- 우리사회에서는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선생님에게 1년간 양변기물을 먹인 초등생』이란 제목으로 문화일보 2013년 4월 10일자 기사 이다.

최근 휴직을 끝내고 학교에 돌아온 강북지역의 한 20대 초등학교 여교사 A 씨는 지난해 겪은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교단에 서기가 쉽지 않다. A 씨는 지난해 초등하교 5학년 담임을 맡아 평소 예의바르고 충실한 B 양에게 종종 마실 물을 떠다 줄 것을 부탁했다. B 양은 늘 밝은 표정으로 물을 떠왔고 A 씨는 목을 축여가며 수업을 했다. 그러나 2학기도 절반가량 지난 지난해 10월 A 씨는 한 학부모로부터 B 양이 떠오는 물이 정수기물이 아니라 화장실 양변기 물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전해 들었다.

B 양은 A 씨가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변기의 물을 떠온 뒤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고는 물을 마시는 A 씨를 보며 즐거워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A 씨는 학교에 병가를 내고 전문가 상담을 받았다. 그러나 믿었던 제자에게

배신당한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A 씨는 결국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학기를 마치지 못한 채 휴직을 했다.

지난해 경기 지역의 한 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여교사 C(28) 씨도 부임 6개월 만에 휴직했다. 젊은 여교사를 얕잡아본 학생들이 C 씨에게“가슴이 크다”등의 성희롱 발언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은 C 씨는 정신과 상담까지 받았지만 쉽사리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나 복직한 현재도 여전히 상담 치료를 받고 있는 C 씨는 자신을 성희롱했던 학생들을 혹여 마주칠까 늘 불안해하고 있다.

 

교사에 대한 학부모들의 폭언과 폭행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9일 부산 기장군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김모(43) 씨가 만취 상태에서 학교를 찾아와 수업하는 아들을 끌고 가려다 만류하는 여교사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김 씨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흉기를 구입해 다시 학교로 들어오다 경찰에 검거돼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또한 이런 일도 있다. 어느 33세 된 농구선수가 놀이터를 지나다가 고등학생 4명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너희들 학생이 담배를 피우면 되느냐?”고 일갈 하니까 학생들은“아저씨 돈 많아요?”라고 응수하여 농구선수가 그 들을 한 대씩 때렸고 결과로 파출소에까지 갔었고 농구선수가“너희들 그러지 말고 내가 입장을 시켜 줄 테니 농구장엘 와라”하여 무료로 농구구경을 시켜 주고 밥도 사주어 화해를 했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은 농구선수에게 자식들의 훈계를 잘 해주어 고맙다고 했고...

필자가 어릴 적에 속담으로“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다.”이정도 이었는데, 지금의 청소년들은 이정도 는 애교이고“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이다. 이것이 다 교육의 잘못으로 초래된 현상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이 지경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 컴퓨터에서의 게임과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 모든 일에 思惟사유와 思索사색을 않고 그냥 無意識的무의식적으로 일을 저지른다. 그리고는 그 일이 잘하는 짓인지 잘못하는 짓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저지르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를 앞으로 어떻게 질서를 유지 해 나아갈 수 있을까? 참으로 암담하지 않는가?

인류사회에 현존하는 종교들이 인류의 정신을 2~3천 여 년을 啓導계도 해오고 있지만 그 것들이 인류를 바른 길로 이끌지 못하고 인류는 오히려 점점 더 사악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고도 그 집단들이 탐욕과 미련을 못 버리고“더불어 살자.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만을 잠꼬대처럼 되 뇌이고 있을 것인가?

 

현실은 이스라엘은 이란을 이란은 이스라엘을 서로 지구상에서 없애버려야겠다고 하지 않는가?

기독교가 지구상에 등장하고 나서 단 한 시대만이라도 땅에는 평화가 이루어 졌는가? 불교는 무얼 했는가? 儒學유학은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단 한번이라도 실현 해 보았는가?

기독교는 초기에“나(예수)를 따르려거든 가족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더불어 살자”라고 외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 건가? 기독교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두 문장 중에 앞 문장“나를 따르려거든 가족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라”의 역사이지“더불어 살자”는 단 한 시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이다.

〔마태복음 10장 32~40절〕32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是認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是認시인 할 것이요.> 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34절 내가 세상에 和平화평을 주려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劍검을 주려(던지려)왔노라.> 35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不和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食口식구리라. 37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절 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40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예수가 이렇게 말 한 것이 아니고 문자주의 파들이 이렇게 정립을 해 놓은 것일 테지만,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이렇게 이루어 졌다는데 주목을 해야 된다.)

기독교 신자 개개인이 철저하게 자신 하나만을 위하여 신앙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지,“예수를 믿지 않고 끝까지 버티면 100% 지옥에 간다고 협박을 한다. 이러니 철저하게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아닌가? 이보다 더한 이기주의는 없다. 우리가 지금 이 이기주의를 줄기차게 쫓아가다 보니 앞의 일화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고 앞으로 갈수록 더욱 심화 될 것이다.

불교는 철저하게 自我자아를 탐구하고 자아를 啓發계발하고 자아를 上昇상승시키는 가르침이다. 전후좌우 주위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 단적인 예가 석가는 아버지 정반왕의 뜻을 거역하고 야반도주를 하여 출가하였다.

필자가 조계사에 나갈 적에 어느 스님의 법문을 예로 들자면...

승려가 된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 누님은 동생이 승려임에도 불교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동생인 승려가 누님을 초청 해 놓고 맛있는 음식을 상에 가득 차려놓고 혼자만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래서 누님은 화가 나서“네가 지금 나를 초청 해 놓고 너 혼자만 맛있게 먹고 있는 행위가 무엇이냐?”라고 항의 하니까 동생은“내가 음식을 먹으니까 맛이 있는데 누님은 먹지 않으니까 맛을 모르지요?”“그와 같이 누님은 불교를 안 믿으니까 부처님을 모르지 않아요?”라고 하여 누님은 결국 동생에게 승복하고 불교에 귀의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를 믿는 것도 믿는 자 혼자만이 자아계발과 자아 발전이 있는 것이지, 믿지 않는 자에게는 국물도 없다.

儒學유학은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이것이 한 국가의 통치자 한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한 국가의 통치자가 되기 위하 여는 패권을 쟁취하여야 통치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으므로 오로지 쟁취의 수단밖에 없다. 쟁취란 順理순리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逆理역리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儒學유학의 垂直的수직적인 틀 안에서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 이것을 이룰 수 없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본 고장인 중국에서 요, 순 시대의 태평성대를 한 번도 재현하지 못하였고...

孔子공자의 후예인 중국은 지금 儒學유학에서 가르치는 中庸중용을 망각하고 過猶不及과유불급을 모르고 貪慾탐욕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지나 족이 55개 소수민족을 하나로 묶어서 거대한 단일국가로 이끌어 나아가는 이것은 逆理역리중에 역리이다. 그것도 모자라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였다고 마치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듯이 중국도 억지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사람들 중에는 북한이 무너져도 우리가 통일을 못하고 중국에게 빼앗길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자- 지구촌 인류는 이렇게 희망의 미래보다 암담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환경문제를 생각하면 더욱 암담하고, 그러나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지구촌 인류의 생명을 지켜줄 가르침이 여기 있지 않은가?

一無憾且怫異者(일무감차불이자)

한 사람도 섭섭하고 답답하지 않게 하라!

즉“너와 나, 그”에게도 協협; 어울려 서로 돕고 살아라, 여기에서“그”라는 대상은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제 삼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나”가 먼저가 아니고“너”가 먼저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차선이고 우리가 우선인 것이다.

홍익인간사상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불교의 창시자 석가는 그의 아버지 정반왕의 뜻을 거역함으로 석가는 그를 낳아준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섭섭함과 답답함을”안겨 주었다. 이러고도 일체중생을 구제한단다.

忌三妄(기삼망); 僞-거짓, 怠-게으름, 違-어김을 하지 말고

盡三道(진삼도); 眞-참, 勤-부지럼, 協-어울림을 다하라!

이 가르침을 유치원 때부터 반복교육을 시키면 세상은 한 세대만 지나면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그 동안 서구의 교육방식을 맹목적으로 쫓아가다보니 필자가 지금 65세 인데 이 짧은 기간 동안 우리사회는 필자가 어릴 때와 지금의 사회 환경이 天壤之差천양지차로 바뀌었다.

無怨逆之患 親疎無別 上下無等 男女平權
무원역지환 친소무별 상하무등 남녀평권

老少分役... 自成和樂...一無憾且怫異者
노소분역 자성화락 일무감차불이자

남에게 원한 사는 일을 하지 않아 보복을 당하는 우환이 없고, 친하고 친하지 않음이 없고, 위 아래로 나누는 등급-계급도 없었다.

남녀는 평등하고, 노인과 젊은이는 그에 맞는 일을 하고, 스스로 성취하여 즐거움이 있고, 한 사람도 섭섭하고 답답하지 않았다.

官無兼權 政無越則 官(관)은 권력을 겸하지 않고

관무겸권 정무월칙 정치는 법을 어기지 않는다.

이 정도의 가르침이면 혼돈에 빠져있는 현 인류를 구제할 수 있다.

“부뚜막의 소금을 놔두고 언제까지 인류를 종말의 길로 몰고 가는 남의 꽁

무니만 쫓아 갈 것인가?“

檀君의 子孫 弘仁 朴 鑽 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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