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박찬희 칼럼니스트>

[칼럼=LPN로컬파워뉴스] 칼럼, 단군신전

◉ 檀君聖殿(단군성전)에 대하여

앞글(35번 p2)에서 말 한 것처럼 우리는 단군성전 하나 번듯하게 세우지 못하고 있다. 우리 강토의 명산의 명당자리에는 불교의 사찰들이 다 차지하여 깔고 앉아있고 도심의 그 비싼 땅에는 기독교의 교회들이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우리의 국조이신 단군성전은 사직공원 한 쪽에 현정회가 주관하는 초라하고 왜소한 단군성전 하나뿐이다.

“도대체 우리는 주체성과 자존심이 있는가? 모두가 얼이 빠져 한심한 우리들...”

※ 송 호수 박사님은 檀君神殿(단군신전)이라고 표현한다. 단군은 聖人之上(성인지상)이고 天神之下(천신지하)

즉, 성인의 위이고 하나님의 아래이기 때문에 단군은 神과 人間의 합쳐진 자리 神人이다. 그래서 檀君神殿(단군신전)이라고 하셨다.

나와 나라의 운영은 있고, 없음으로 가릴 일이 아니다.

“桓(한)=全一(전일)”모두가 하나 되어 같이하는-홍익인간이다. 있는 층과 신앙에 매달린 층이 겨레와 떨어져 協(협)-어울림을 마다하고 개인의 안녕과 기복으로 갈라진 인심이 이들 전사들을 돌보지 않아 섭섭하게 하였고 나아가 국조 단군성전마저 초라한 몰골로 이끌어가게 한 것은 아닌가. 어버이 없는“나”없고 나라 없는“국민”이 없다. 나는 겨레 속에 있는 것이다. 이에서

◆ 敬天(경천); 참에 敬謹(경근)하며

◆ 崇祖(숭조); 어버이를 崇尙(숭상)하고

◆ 愛人(애인);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이 전하고 있다.

“나와 겨레”를 확인 하는 것이 바로 敬天, 崇祖, 愛人이요, 애국하는 마음이다. 이리하여 나라사랑의 本堂(본당)으로 우리는 국조 단군성전을 모시는 일이다.

X 유생은 향교에 앞서

X 불자는 불당에 앞서

X 기독교는 교회에 앞서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개천절 노래에서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고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다.”라고 하면서 그 뿌리는 아는 사람이 있는가?

뿌리 없는 “나와 겨레”가 어찌 존재하며 나라 없는 국민이 어찌 있겠는가? 뿌리와 종교(홍익인간 이념)를 망각하고 외래신앙을 종교로 하는 그릇된 견해로 국조 단군성전 하나 제대로 건립하지 못하고 있음은 민족의 수치다. 남북으로 갈라진 이 시점에서 미국의 자본주의가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요, 구소련 공산주의 잔영이 우리를 돌봐 줄 리도 없다.

또한 외래신앙이 우리를 구원하여 줄 것도 아니다. 오로지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의지로 우리의 종교-홍익인간으로 한데 뭉쳐 자업자득할 따름이다.

◉ 국가권력과 종교

오늘날과 같이 신앙이 자유로운 시대에도 기독교의 반대에 부딪쳐 국조 단군성전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형편에 옛날 왕권을 세습한 절대 권력시대 숭유사상을 국교로 하다시피 한 이씨조선시대 어떻게 그 세력을 물리치고 암암리에 거대한 불당을 산중에 건설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왕권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는 산중에 불당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崇儒(숭유)체제에서 왜 불당건립을 지원하였을까.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 372)에 順道(순도)와 阿道(아도)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한다.

국가권력은 사회상을 유도한다. 오늘날 남북 공히 소도 종교-홍익인간-화백제도를 마다하고 이북은 공산주의 사회요, 이남은 자본주의 사회로 흐르는 것은 바로 국가 통치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리의 본형은 홍익화백으로 왕권도 아니요, Democracy-민주주의도 아니요, 공산주의도 아니요, 자본주의 사회도 아니다. 오로지 서로가 어울려

一無憾且怫異者(일무감차불이자)로 국민과 국가가 하나되어 섭섭하고 답답하지 않는 人間事(인간사)로 모-두 화백 하여“하나”로 어울려야 한다는

“天 地 人(천지인)”人倫意識(인륜의식)이다.

소도가 산중에 위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할 시대는 전기 단군조선시대(1세~21세 단군)로 권력을 세습하지 않는 화백주의 시대였다. 이후 단군세습(22~47세 단군)으로 전환되면서 단군 화백주의는 세습제도에 걸림돌로 남게 된다.

세월이 흘러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 372)에 불교를 도입하고 소도를 점거한지 1,000여년이 흘러 AD1392년에 이씨조선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화백제도의 여음 즉 소도의 뿌리는 산중의 불교사찰에 남고 있다.

이성계는 세 가지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왕권을 쿠데타로 탈취한 불의, 화백제도의 뿌리, 또 하나는 고려의 잔재세력이다. 이들을 무마하는 방안이 바로 산중의 불당을 양성화하여 불당건립을 지원하고 이씨왕권에 항거하는 층으로 하여금 이곳에 은거하게 하여 소도 이념을 불교로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게 함으로서 3가지 고민을 푼다.

※ 이씨조선은 불교의 폐습으로 유교를 도입 하면서도 불교를 지원했다는 모순점이 있다.

이런 정치의 배경에서 소도종교는 이조에 이르러 철저하게 배타되고 불 교에 동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가 마치 우리의 것으로 또는 “호국불교”로 착각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사를 모르는 소치이다.

※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이듬해(1393~1394) 고려의 구악을 청산하는데 여 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급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개간한다.

이는 고려 잔영을 청산하는 일에 앞서 소도 화백제도를 희석하는 목적 으로 개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리하여 삼국사기에는 고조선-기가 전무하고 삼국유사에는 단지 378자 로 기술되었다고 보아지는 것은 아닐까?

고구려의 불교도임은 자생적인 신앙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단군조선시대의 화백제도를 배타하고 고구려 왕권세습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도입된 것이고, 이씨조선이 유교를 도입한 것도 고려의 잔재세력과 화백제도를 희석시킬 목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민중이 스스로 도입한 것은 아니다. 즉 국책으로 도입한 것이다.

기독교(가톨릭)의 유입은 이조가 부패되어 탐관오리들이 들끓고 백성들을 수탈함으로 의지할 곳을 잃은 백성들이 구세주를 찾는 심정으로 유일하게 스스로 받아드리고 있다.

檀君의 子孫 弘仁 朴 鑽 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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