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LPN로컬파워뉴스] 박찬희 칼럼니스트, 학문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부모님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모신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기원한다는 것은 즉 나에게 기원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參佺(참전)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化靈(화령)으로 나의 인간사를 修行(수행)하는 것이지 신에게 기원하여 소망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은 소망을 이루게 하는 대상도 아니고 또한 사후세계를 천당과 지옥으로 유인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신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맞이하는 이승의 인간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참되게 영위한다는 것이고, 사후세계에 있어서도 신앙의 척도에 따라 천당과 지옥으로 분리된다는 개념은 없다.
이것은 인생은 이승(현생)에서 혼령은 저승(내세)에서 영생한다는 일원적인 개념이다.
이 대목을 심도 있게 思索(사색) 해 보시면 1번의 글에서 인간은 神의 分身(분신)이고 神과 同格(동격)이라는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를 하나님의 반열에 올려놓고 인간을 天上天下(천상천하) 唯我獨尊(유아독존)이라고 우주에서 인간이 가장 존귀한 존재로 즉 인간을 神의 상위에 놓았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는 인간이 神의 노예이고 종이다. 오로지 神은 경배와 복종의 대상이지 감히 神을 처다 볼 수도 없다.
인간이 이 육체를 벗어나면 그 영혼은 바로 神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영혼의 殊勝(수승)한 根氣(근기)에 따라 현 이생에서의 생활과 같이 그(사후)세계에서도 자리매김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해를 하면 나(我)가 나의 主人(주인)이고, 大自由人(대자유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은 때로는 외롭고 고독하지만 주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함으로 얼마나 자유로운가? 또한 이승(현생)에서의 삶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修道(수도)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가장 현명한 삶이 될 것이다.
神(신), 人間(인간), 짐승이 있는데 우리의 인간의 세계에서만이 自我(자아)를 啓發(계발)하고 上昇(상승)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승의 영혼들은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현 지구상의 인류의 숫자보다 더 많은 영혼들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영혼들은 기회만 있으면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데 그 태어나는 부모는 영혼의 根氣(근기)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즉, 부자 집에 태어나는 사람 가난한 집에 태어나는 사람 이 모두가 자신의 根氣(근기)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부모가 태어나기 실타는 나를 억지로 끌어다 태어나도록 강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그 부모에 의존하여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승에서의 모든 일들은 나의 책임이지 그 책임이 他(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불행을 때로는 부모 잘못 만난 탓으로 돌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참으로 주객이 전도된 발상이다. 부모는 오로지 고마움의 대상일 뿐이다. 세상에 부모의 은덕에 보답을 다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홍익인간사상은 崇祖(숭조)가 가장 중심사상이다.
이러하니 이생에서 어찌 參佺(참전) 修行(수행)을 하지 않고 짐승처럼 막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다) 學問(학문)
1) 文字學(문자학)
檀君上世 必有文字(단군상세 필유문자)...
神市有鹿書 紫府有雨書 蚩尤有花書 鬪佃文束
신시유녹서 자부유우서 치우유화서 투전문속
伏羲有龍書 檀君有神篆
복희유용서 단군유신전
今漢字亦承其支流也 明矣
금한자역승기지류야 명의
桓檀(한단)시대에 문자가 있었다. 신시에서는 녹서가 있었고 자부에서는 우서가 있었으며 치우에는 화서-투전문속이 있었다. 복희에는 용서가 있었으며 단군시대에는 神篆(신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오늘의 漢字(한자; 스승님은 桓字-한자로 이름 함)는 이에서 유래 된 것이 분명하다.
三世檀君 嘉勒 庚子二年(삼세단군 가륵 경자이년)
時俗尙不一 方言相殊 雖有象刑 表意之眞書 十家之邑語
시상속불이 방언상수 수유상형 표의지진서 십가지읍어
多不通 百里之國字 難相解 於是 命三郎 乙普勒
다불통 백리지국자 난상해 어시 명삼낭 을보륵
譔正音 三十八字 是爲加臨土 其文曰
선정음 삼십팔자 시위가림토 기문왈
여기에 옛 가림토정음 38자를 넣지 못함을 사과 함
3세 단군 가륵 경자(BC 2,181) 2년 때에 풍속은 같지 아니하고 방언도 서로 다르다. 비록 상형 표의문자는 있으나 100리 떨어진 나라말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삼낭 을보륵에게 명하여 正音(정음-표음문자) 소리글 38자를 가리게 한다.
오늘날 한글이 세종대왕에 의해 창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앞의 加臨 土正音(가림토정음) 38자의 글자 모양으로 보아 한글의 모체라는 짐작이 간다. 세종대왕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글을 창제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 송호수 박사님은 가림토문이 한글의 前(전)문자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우리는 桓檀(한단)시대에 이미 표의문자인 神篆(신전)을 갖추고 있었고, 여러 나라와 부족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3세 단군 加勒(가륵 BC 2,181)은 삼낭 을보륵으로 하여금 표음문자 加臨土正音(가림토정음-한글의 전신)을 譔(선)-가리게 한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4,100여 년 전의 일로 조상님은 뜻글과 소리글을 완성하였다.
※ 가림토정음을 한단고기에서 접할 때 즉 4,100여 년 전에 한글의 전신인 가림토정음 38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日本神社(일본신사)는 비석에, 沖繩(오끼나와 옛 琉球國)은 도서관에 그리고 서인도 부족 중에 현재 가림토정음 문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 TV에 방영된 바 있어 가림토정음의 실존을 확인하게 한다. 나아가 가림토정음의 유래가 유일하게 한단고기에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단고기가 허무맹랑한 위작기록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된다. 위서라고 주장하는 쪽은 이 증언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얕은 식견으로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함부로 지껄일 일이 아니다.
檀君의 子孫 弘仁 朴 鑽 羲